춘천성시화운동본부
원문 주소  

김동정.PNG

 

 

폐허가 된 춘천과 교회예배당

  1952년 봄 한국기독교연합회(NCC)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전쟁 중 완파된 예배당은 감리교 84, 장로교 152곳이었고 반파된 곳이 감리교 155, 장로교 468곳에 달했으며, 기독교 계통 학교와 병원, 기타 건물들도 대부분 파괴되어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4후퇴 이후 전개된 춘천지역에서의 전투로 춘천지역은 시내전체가 거의 파괴될 정도였다. 이에 마석피난(1950.11.18) 때까지만 해도 무사했던 춘천중앙감리교회의 예배당 건물은 물론이고 봉의동에 있던 선교부 건물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옥천동에 있던 2층짜리 선교부 병원 건물도 폭격을 맞아 지붕과 2층이 날아가고 1층만 남았다.

 

image01.png

 

 

  19533월 춘천지방감리사 박내철(춘천중앙교회)이 보고한 내용 중에 연회에서 미수복지인 춘천지방에 단독 임명을 받고(1951.11) 지방을 순회해 보니 세 곳만 반파 정도로 남았을 뿐이요, 15교회 예배당과 15기도처와 주택 및 부속기관 전물전부가 전소 전파의 참상이라고 하였고 19553월 서울에서 개최된 연회에서는 지방 내 복구상황을 볼 때 신축예배당으로 완성 봉헌 예배당 수 15, 신축 중에 있는 예배당 수 6인데 끝으로 미 군목들의 투지와 우리 감리교 군목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그리고 미 모교회에 의한 후원 원조와 총리원의 원조를 감사드리며 특히 선교사 구포리 씨의 협력이 컸음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부흥 발전만이 있을 본 지방형편을 보고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195111월부터 19553월까지 박내철 감리사가 교회복구 등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다.

 

눈물로 성전재건하는 춘천 성도들

  중앙감리교회의 경우, 수복 후 요선동 한옥에서 예배드리다가(중앙교회 땅에서 400~500m 떨어진 곳) 1층이 남아있던 병원건물에 2층을 올리고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임시로 예배를 드렸다. 1955년 미 선교부의 복구 보조비 480만 원과 헌금120만 원으로 남선교부 병원건물(붉은벽돌 건물)을 인수하여 교회를 재건(현 옥천동 춘천미술관)하였다.
후평리감리교회의 경우, 역시 미군 공병대의 후원과 김종철 선생(훗날 장로)의 노력으로 지어졌다. 김종철 선생은 친척의 밭을 빌려 예배당 기지를 확보하고 우두교회 이재선 담임목사에게 부탁하여 설계도를 대충 그렸다. 이 설계도를 가지고 춘천지방감리사인 박내철 목사가 춘천 대건사에게 청부를 주어 건축을 시작하였다. 후평리 교회는 19544월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 해 11월초에 완공하였다.

 

image02.png

 

  우두교회의 경우, 이원석 장로의 땅 160평 기증, 우두동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의 목재와 시멘트 제공, 미국에 연수(세계 YWCA 지도자 훈련 연수) 갔던 이원석 장로의 차녀 이원화의 함석지붕 비용 300달러(이원화가 출석한 미 제임스타운 제일감리교회 100달러 포함), 성도들의 정성어린 기도로 1955520일 류형기 감독을 모시고 봉헌예배를 드렸다.

  석사감리교회의 경우, 1951105일 김광예 성도의 집에서 동춘천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복구되어 평신도 사역자 장희성이 시무하였다. 그 후 석사동 491번지로 옮겨 천막 예배당과 흙벽돌로 된 3칸 주택을 세웠다. 19541015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 원조로 석사동 360-1에 목조 예배당 50평을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동부장로교회의 경우, 195231일 판자집으로 된 47평의 임시예배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77일 준공하였다. 이어 19554572평의 붉은 벽돌 예배당이 착공되었다. 2군단 공병대의 도움과 성도들의 열정, 즉 교회에 올 때마다 벽돌을 날랐고 기초공사에 소요되는 돌들을 소양강가에서 날랐으며, 여성 성도들도 모래를 나르는 등 몸 연보까지 아낌없이 드려 1956~57년경에 완공하고 196072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춘천중앙성결교회도 수복 후 19525월에 홍순각, 최정화, 신덕기 등이 김규호 목사를 모시고 교회재건을 하고 19539월에 목조건물로 신축하여 196710월 새성전 건축을 위해 철거될 때까지 활용하였다.

 

받은 대로 돌려준 보은의 성전 건축

  이 이야기는 6.25전쟁 직후 미군 장교의 관심과 미 공병대의 인력과 자재지원으로 세워진 춘천가산감리교회에 관한 것이다. 6.25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종전을 위한 협정이 한창이던 1953610강순희 권사의 가정에 기도처가 만들어지고 1953810일에는 기도처를 가산교회로 호칭하면서 첫 교역자 이영선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렇게 한 가정집의 사랑채에 모여 열심으로 기도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을 움직인 것일까? 우연한 기회로 연결된 미 제124사단 2공병단에 근무하던 댄 소위의 관심을 시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교회건축이 시작되고 미 공병대의 인력과 자재의 지원으로 19545월에 어엿한 십자가를 내건 예배당이 완공되어 동면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2013년 가산교회는 교회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미얀마에서 사역하는 이원주 선교사(충북연회 제천 시온성교회 소속)를 통해 잉마삥교회, 인레곤교회 두 교회를 건축(2019년 봉헌)을 하였고 현재 민동교회와 기숙사를 건축(2021년 봉헌예정) 중에 있다. 60년 전 가정집에서 예배하던 때에 이름 모를 이들의 도움으로 예배당을 세웠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던 중, 미얀마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 선교사를 통해 “30여 명의 성도들이 예배당이 없어 가정 가정에서 돌아가며 예배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과거 받은 대로 돌려주자는 슬로건 아래 속회헌금 일체를 선교를 위한 헌금으로 작정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산교회의 종탑이 눈길을 끄는 것은 종을 바치고 있는 기둥 때문이다. 종탑의 기둥을 이루는 주재료는 포탄의 탄피이다. 교회설립 당시 나무 기둥을 이용해 세웠던 것을 후에 포탄의 탄피를 이어 붙여 종탑의 기둥으로 사용한 것이다. 실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모습이리라(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사야2:4). 민족상잔의 비극의 전쟁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일에 사용되었던 포탄의 탄피가 이제는 구원의 소리를 떠받치는 종탑의 기둥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과 복음의 상징으로 굳게 서 있다.

 

image03.png

 

  이렇듯 접경지 가까이 위치한 탓에 특히 피해가 컸던 춘천! 그 폐허 속에 오늘의 희망을 쏘아 올린 예배당 건축. 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춘천이 있기까지 목숨 바쳐 순국하신 국군 및 UN군 장병들, 내 고장 치안과 행정을 위해 순국하신 경찰과 공무원 등 많은 분들, 피난을 오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후세에 자유와 평화를 남겨준 무수한 시민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오늘까지 불어넣어 주신 믿음의 선배님들과 미 공병대(미국 교회 포함) 및 국군 공병대를 비롯하여 예배당 건립에 일조하신 성도분들, ‘이 땅에 절대로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모든 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김동정 장로(신성교회, 카톨릭관동대 교수)
Standard Post with Image

[70주년 특집(4)]6.25 폐허 위에 ...

폐허가 된 춘천과 교회예배당 1952년 봄 한국기독교연합회(NCC)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

춘천성시화운동본부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