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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초기 춘천대첩과 춘천지역 교회와 성도들(1)

 

6.25전쟁 발발과 춘천대첩

1950625일 세상이 잠들어 있는 가량비 내리는 새벽 330! 동해안 정동진, 등명동에 북한군 945육전대가 상륙하고 있었다. 이때 해안에서 경비하고 있는 전대육 순경이 6.26전쟁 첫 전사자가 되었다. 이어 새벽 438선에서 일제히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각종 포와 자주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이어 동해안 삼척 임원진에는 북한군 766부대가 상륙하여 한반도 허리를 치고 있었다.

춘천 북쪽 30km 중동부전선에서는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모진교를 사이에 두고 동쪽 샘밭 쪽에는 7연대 3대대 8중대장 이내흥 중위가, 북한군 2사단의 일제 포격이 중대장 참호에 명중해 부하들과 함께 산화하였다.

춘천 북동쪽 내평리에서는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감을 비롯 내평지서원 10명과 김봉림 대한청년단원 등 11명이 북한군 2사단 4연대 남하를 1시간 동안 저지하다 북한군의 포격에 전원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들은 국군 6사단이 춘천 남쪽에 저지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국군의 소양강 방어선 구축 등 춘천지구전투 승리의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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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춘천시

(1952,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춘천대첩은 6.25전쟁 초기 단계에서 국군 6사단, 춘천시민, 학도병, 경찰(강원경찰국, 춘천경찰서, 강원경찰학교, 전투경찰 9대대)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국군 단독 최초로 유일하게 승리를 이뤄낸 전투로서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등과 함께 6.25전쟁 3대 대첩에 들어간다.

3일간의 전투에서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6,800명을 사살하고 120명을 포로로 획득, 전차와 자주포 18대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북한이 2군단을 조공으로 하여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진출시켜 국군의 배후를 차단하고 수도권 일대의 국군을 전략적으로 포위하려는 전략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춘천지역의 기독인들의 피난과 예배당의 파괴 1

북한군의 1차침공(6.25전쟁 발발)에 이어 2차침공(1.4후퇴) 때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피난을 서둘러 떠났다. 춘천지방 선교사를 지냈던 스톡스(Charles D. Stokes, 목원대학교 설립자)의 증언이 기독인들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춘천이나 서울, 원주, 개성, 수원, 천안, 이천 같은 도시, 심지어 대전까지도 완전히 비었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교인들은 자신이 색출 대상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개월 동안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와 집을 떠나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피신하고 교인들은 흩어졌기에 교회생활은 완전 중단된 형편이었습니다. 이 시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엄청난 피난민 군중을 구제하는 것 외엔 없었습니다.

 

라고 기독교인들은 색출대상이었기 때문에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춘천뿐만 아니라 점령당한 지역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고 모두 숨거나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침공 이후 수복되었을 때는 처절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된 춘천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교회 몇 곳이 소실되었는데 우리 교인 작은 무리가 신실한 속장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습니다.”(선교사 스톡스가 박내철 목사를 통해 들은 말)라고 할 정도로 춘천 자체가 처절하게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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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중앙교회 선교사 사택과 교회

 

 

춘천중앙감리교회의 경우, 당시 박내철 담임 목사는 1951112일에 부산에서 동부 중부 서부연합연회 및 특별총회에서 춘천지방감리사 및 춘천중앙구역목사로 임명되었다. 중앙교회 교인들은 그때까지 목사가 없어 신실한 속장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04일 수복이 되었지만 이 기쁨도 잠시 1118일 마석으로 피난을 해야 했다[마석미난]. 이때까지만 해도 요선동 예배당을 비롯하여 선교부 모든 시설은 북한군에게 징발되었고 모든 건물이 파괴되지 않았다.

이후 전개된 톱질전쟁(남한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한으로 내려오는 것을 톱질에 비유) 때 예배당 건물은 물론이고 봉의동에 있던 선교부 건물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옥천동에 있던 2층짜리 선교부 병원 건물도 폭격을 맞아 지붕과 2층이 날아가고 1층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춘천에 남아있던 작은 무리가 속장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1.4후퇴 이후 춘천이 수복되자 춘천중앙교회는 반파된 옥천동 73번지 선교부병원 건물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다음 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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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정 장로(신성교회, 카톨릭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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